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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케네디라운드와 동경라운드

by BrandStory 2022. 6.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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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상의 장으로서 다자간 무역협상의 중요성이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1964년 5월, 56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열린 케네디라운드부터였다. 1960년대가 되면서 미국은 세계 무역시장에서 일정한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우선은 그토록 막대한 원조를 통해 투자되었던 달러가 무역수지를 통해 자국으로 환원되지 않았다. 게다가 일부 유럽국가들의 경제적 안정은 미국 내 다국적 기업들의 해외침투를 유도하는 동시에 달러의 해외유출을 심화시켰다. 이것은 곧 무역수지 적자를 가중시켰고 이러한 사정의 심각성은 미국이 더이상 세계무역의 판도에서 주도권을 행사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발전되었다. 이 때부터 미국은 GATT의 다자간 무역협상을 보다 실질적으로 이용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모든 관세의 일률적 인하, 농산물 무역에 관한 본격적인 협상, 비관세 장벽의 제거등을 주요 의제로 제시하면서 미국이 다자간 무역협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미국은 이 협상을 통해 35%라는 일률적인 관세인하를 관철시키는 동시에 처음으로 농산물 무역문제를 거론하는 성과를 이끌어냈다. 하지만 케네디라운드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또 그 이후에도 미국의 무역수지 적자기조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것은 1960년대 이후 세계 무역시장에서 자국의 위상이 전에 비해 상당 부분 약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베트남 전쟁의 확대와 다국적 기업의 해외진출을 통한 미국의 무리한 달러 대외지출이 계속되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미국이 노렸던 바는, 우선 달러의 실질적 가치의 하락과 그로 인한 달러의 금과의 교환을 수월하게 하자는 것이었고, 이것은 이미 협정을 맺고 있는 유럽제국들과 일본 정부의 선에서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미국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미국의 기대대로 달러의 실질적인 가치는 하락되었지만, 선진국들의 고정환율제의 고수는 달러의 명목가치를 그대로 유지시켰으며,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달러의 실질적인 평가절상 효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상황은 당연히 미국의 무역수지 적자 기조를 그대로 유지시키는 동시에 국내 산업의 경쟁력을 극도로 악화시키는 계기로 작용했다. 결국 파탄 직전에 이른 미국은 금태환정지의 공식화, 고정환율제로의 전환등을 실행하였는데 이런것들이 이른바 닉슨 독트린으로 불리운 미국의 고육지책이었다.

이러한 변화는 미국뿐 아니라 여타 선진국들도 개발도상국들의 도약과 석유파통으로 인해 기간산업으로 여겨져오던 기계, 철강, 자동차산업을 포기하고 첨단기술산업을 전략산업으로 전화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다라 기술 및 노동집약적 산업은 점차 개도국의 몫이 되었고 아울러 개도국은 세계 무역시장의 새로운 질서를 요구하며 다자간 무역협상에 참여하게 되었다. 케네디라운드 이후의 이러한 세계 경제질서의 변화는 또다른 무역협상을 잉태시켰는데 그것이 바로 동경라운드이다. 동경라운드는 무려 99개국이 참여한 가운데 이후 5년 7개월간 계속되었다. 케네디라운드에 비해 새로운 점은 우선 개도국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선진국과 개도국간의 대립이 표면화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동경라운드의 주요 의제에서도 잘 드러났다. 개발도상국의 요구로 개도국에 대한 관세와 비관세에 대한 일반 특혜조치등의 문제가 거론되었고 선진국에서는 개도국에 대한 규제론을 명문화시키는데 성공했다. 또한 선진국의 수입규제조치의 하나인 다자간 섬유협상을 GATT내에서 공식화시킨 것도 동경라운드의 특징중의 하나였다. 이외에도 동경라운드에서는 수입허가 절차, 관세평가, 반덤핑 관세, 농산물 등에 대한 문제가 집중거론되었고, 이중 몇가지는 협정으로 체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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